입생로랑 브랜드 탄생의 든든한 조력자, 연인 피에르 세계적인 브랜드 YSL 의 설립자 입생로랑 그의 천재적인 디자인 실력 뒤에는 남자와의 불같았던 동성애와 불륜 그리고 치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1. 평생의 파트너, 피에르와의 첫만남
1958년 생로랑은 23살의 어린 나이로 미래가 촉망받는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는 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보다 6살 많은 피에르 베르제였습니다.
이 커플은 잡지사에서 주최한 파티와 함께 참석하는데 거기서 피에르와 생로랑이 우연히 처음 만나게 된 것이죠. 둘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날로 피에르는 자신의 연인 베르나르를 버렸고, 생로랑과 연애를 시작하는데요, 당시에 대해 피에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처음 생로랑을 만났을 때 그는 아주 내성적인 소년이었어요.
당장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있었는데 마치 세상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죠.
어떻게 8년간 함께한 남자친구를 그렇게 한순간에 버릴 수 있었을까요. 한눈에 반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겠습니다."
둘은 단순한 연인 사이가 아니라 사업 파트너로 발전하게 됩니다. 당시 생로랑은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는데 매출 부진을 이유로 짤리는 사건이 발생하죠.
이때 피에르가 생로랑을 위로하면서 아예 생로랑의 이름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설립하자고 제안합니다.
생로랑은 디자인 피에르는 경영을 담당하면서 사랑도 사업도 함께 키워나가게 되었죠.
입생로랑은 YSL브랜드에서 디올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디올의 디자인은 대체로 여성적이었는데, 이와 달리 생로랑은 다소 남성적인 디자인을 시도했죠.
여성들에게 턱시도 정장을 입히고 재킷 어깨라인에 패드를 덧대어 파워쉘도 룩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입니다.
YSL의 이런 과감한 디자인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피에르는 생로랑을 샤넬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칭송하며 물론 디올이나 발렌시아가의 패션도 훌륭하지만 샤넬이나 입생로랑 브랜드는 그들과 다른 특별한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었죠.
샤넬은 활동적인 디자인을 통해 여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했고, 입생로랑은 여자들에게 정장을 입히면서 사울을 심어줬기에 여성복 디자인의 틀을 벗어났다고 얘기했습니다.
한편 YSL브랜드가 성공할수록 생로랑은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는 피에르의 노력이 중요했는데, 그는 소심한 생로랑이 유명인사가 될 수 있도록 매일같이 설득했습니다.
키에르는 유명인의 힘을 믿었고 사람들이 옷이 아닌 디자이너 생로랑을 좋아하게 되면 입생로랑 브랜드도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로랑을 광고 사진에 내세워 브랜드의 아이콘이 되도록 기획했고 심지어 한 향수 광고에는 아예 생로랑의 나체를 찍어 광고했습니다. 결국 파리에서 생로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죠.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는 법 생로랑이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둘은 더 이상 파리에서 자유롭게 데이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파리를 탈출하여 모로코의 마라캣이라는 도시에 집을 마련했는데요, 그곳은 두 커플이 미래를 즐길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죠. 그렇게 생로랑과 피에르는 모로코에서 일반인처럼 연애하며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그들은 마라케시에 거주하면서 부유한 이웃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존 폴게티 주니어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였던 짐 볼게티의 아들이었습니다.
마라케시에는 술집이 많지 않았기에 분폴게티의 집에서 믹 재거나 앤디 워홀과 같은 유명인사들과 함께 홈파티를 즐겼죠 사실이 파티는 단순한 사교모임이 아니었습니다.
돈 폴게티의 아내 탈리타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모델로 눈에 두 번째 아내가 되었는데, 마약을 즐겨했다고 알려져 있죠.
돈폴게티 또한 유명한 바람둥이로서 술과 마약을 즐겼다고 합니다.
입생로랑은 탈리타를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여성이라 표현했지만 생전 처음 맛보는 쾌락을 거부할 수 없었는데요.
입생로랑과 피에르는 자주 액티브보의 초대를 받아 파티에 참석했고 마라케시의 유형을 어떻게 즐겼습니다.
약 10년 후 ysl 브랜드는 점점 더 성장했고 생로랑과 피에르는 근처에 더 큰 집인 오아시스 빌라와 마조렛 정원을 구매했습니다. 참고로 마조렛 정원은 자크 마주렛이라는 건축가가 평생을 바쳐 만든 정원이었는데 이혼을 하면서 팔게 되었죠 생로랑과 피에르는 종종 정원을 지나치다가 그때마다 너무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정원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 마주레 정원은 생로랑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에게 디자인적으로 큰 영감을 준 것입니다.
기존 생로랑의 디자인은 흑과 백을 주로 사용했는데이 정원에 머물면서 모로코의 다양한 색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브랜드에도 화려한 색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ysl 브랜드는 립스틱이나 아이팔레트에 마조렛이나 마라케시 이름을 붙여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2. 퇴폐남 자크와의 만남
하지만, 생로랑과 피에르의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입생로랑의 불륜으로 끝이납니다.
그가 36살이 되던 해 자크라는 나쁜 남자를 만나게 된 것 때문인데, 자크는 생로랑의 친구이자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라커펠트의 애인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생로랑은 자크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자크에게 더 끌렸습니다.
그는 술 마약 흡연을 하지 않았지만, 자크는 굉장히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변태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길거리에서 수시로 남자들을 유혹해서 집으로 데리고 온 후 난교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의 상대는 경찰관, 성직자, 테니스 선수, 배우 등 직업을 가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난번 파트너들을 자랑했죠.
라커 펠트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스타일이었는데 자크와의 관계에 대해서 플라토닉 사랑이었다며 육체적인 관계는 맺은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또한 시간이지나 털어놓길 자신의 친구 생로랑을 만나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은 이유는 자크하의 관계가 육체적인게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죠.
하지만 생로랑의 연인 피에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키에르는 생로랑과 육체적 정신적 사랑을 동시에 나누는 관계였기에 생로랑의 바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죠.
또 연인이 아니라 우울증 피에르는 생로랑의 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지만 ysl 브랜드는 계속 같이 운영했고 친구로서 생로랑의 곁을 지켰습니다.
4. 우울증
사업은 계속 더 번창하는 반면 생로랑은 연인과의 결별과 과도한 업무로 무척 힘들어했죠. 당시 그는 술에 중독된 상태였고 마약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피에르는 당시를 기억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입생로랑이 당시 일 때문에 너무 많은 압박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도우려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그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사실 생로랑의 우울증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름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학교에서는 여자 같다며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의 별명은 푸푸였는데 이건 남자 동성애자를 경멸적으로 가리키는 속어입니다.
생로랑은 학교에서 놀림 받을 때마다 속으로 나는 언젠가 성공할 거야라고 되뇌였지만 마인드 컨트롤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학교 나가는게 두려워졌고 계속되는 친구들의 괴롭힘에 결국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작된 우울증은 평생 그를 괴롭히게 되죠.
생로랑은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생로랑도 우울증이 심해질 때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자신에 대한 회의와 고통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렸는데 디자인이 바로 유일한 도피처였던 것이죠.
그는 유년 시절을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인형 옷을 만들며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엄마를 위해 옷을 만들었고 17살이 되었을 때는 양모 사무국에서 주최하는 패션 대회에서 드레스 부문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참고로 칼 락커 펠트는이 대회에서 포트 부문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생로랑은 대회에서 수상한 디자인을 오그지의 편집장이었던 미셸에게 어떻게 보냈는데, 미셸은 그 작품을 보며 평생 살면서 이렇게 재능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극찬을 했고 생로랑을 디올 브랜드의 설립자 크리스찬 디올에게 소개해줬습니다. 그리고 생로랑은 디올의 밑에서 연습생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는 이후 디올을 존경하게 되어 디올 밑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디올 앞에만 서면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는 나에게 예술의 기본을 알려줬습니다"
처음 생로랑이 디올에 입사했을 때는 단추 꿰매기 작업실 청소 등 단순 업무만 주어졌지만, 점차 디올도 생로랑을 믿게 되었고 이후 디올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입생로랑은 세계 최연소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가 수석 디자이너가 된 첫해에는 온갖 압박과 걱정이 있었지만, 결국 패션계의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인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디올의 1955년 A라인 드레스를 재해석한 트라페즈 드레스를 선보였는데 디올의 감성을 잘 살리면서도 백로랑 특유의 세련됨이 엿보인다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5. 전쟁과 성공
생로랑은 첫해의 성공에 힘입어 두번째, 세번째 콜렉션도 진행했지만 반응은 예상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 감각을 불어넣고 싶어 스트릿 스타일에 영감을 받은 '비트니크'라인을 선보였지만, 오뜨꾸뛰르(고급 맞춤복 시장)에서 처음으로 가죽 자켓을 선보였기에, 상류층 고객들은 그 낯선 감성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디올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던 기업가 마르셀은 생로랑이 주 고객츠의 니즈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그를 해고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생로랑은 그대로 전쟁에 끌려갔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의 독립 투쟁으로 전쟁중이었고 정부에서 청년들을 징집하며 알제리로 파견 보내고 있었습니다. 생로랑도 원래 징병대상이었지만 기업가 마르셀이 힘을 써 끌려가지 않고 있었는데 해고되자 바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렇게 생로랑은 학창시절부터 트라우마로 남았던 남성들의 조직생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군대에 들어간지 약 20일 만에 극심한 정신쇠약에 시달렸고, 결국 파리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신병원에서도 무척 힘들어 했는데 당시만 해도 정신과에서 우울증 환자들에게 무분별한 전기충격 요법과 과도한 약을 처방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생로랑은 너무 무서워서 병원에 있는 약 2개월의 기간 동안 화장실을 딱 한 번밖에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35km가 감량된 상태로 몸이 약해져 퇴원하게 되었죠. 퇴원 후 파리로 다시 돌아갔는데 이미 디올에서 짤린 상태였기에 디자인으로서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생로랑에게 패션 디자인이란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니었고 참 그 자체였기 때문에 삶의 방향성을 잃는 것과 같았죠.
그의 연인 피에르는 매일같이 생로랑이 곁을 지키며 위로했고, 아예 생로랑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설립하자고 앞장 있습니다. 심지어 디올을 부당액으로 고소하여 약 7천만원의 위로금을 가져와서 이 금액을 사업자금 삼아 ysl 브랜드를 설립할 수 있었죠.
이후 둘은 성공적으로 브랜드를 운영하다 199년 ysl 패션과 화장품을 구찌에 팔았습니다.
이들은 각각 914억원을 챙겼죠. 생로랑은 어린 시절 괴롭힘 당할 때 스스로에게 되뇌이던 말 나는 성공할 거야를 몸소 실현한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 생로랑은 2008년 6월 1일 2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사인은 뇌종양이었는데 급속도로 몸이 쇠약해져 죽음의 예상할 수 있었죠.
죽기 며칠 전 생로랑과 피에르는 프랑스의 팍스 지도를 통해 법적인 연인으로 인정받았는데요, 팍스는 프랑스에서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동성애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결혼하는 것과 유사한 법적 권리를 지닙니다. 피에르는 이때를 회상하며
"그 결정은 재산상의 문제였고 로맨틱한 이유로 결혼한 건 아니었어요. 우리는 50년을 같이 살았으니 동성애자들도 자신의 파트너에게 유산을 남겨주는 당연하죠" 라고 말했습니다.
생로랑은 화장을 선택했고, 그의 유고는 피에르와 함께했던 마라케시의 마주레 정원에 뿌려졌습니다.
또한 피에르는 프랑스 팍스제도를 통해 생로랑의 비싼 예술품들을 모두 물려받게 되었는데 곧이 예술품들을 경매로 처분했죠. 그는 입생이 아프고 난 직후 예술품을 팔기로 결정했다고 해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입생 없이는 그 예술품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게 이유였죠.
박물관에 기증하는 건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았고, 경매를 통해 진짜이 예술품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추가로 그 수익은 대부분 에이즈 재단의 기부할 것이라 했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생로랑이 남긴 수많은 예수품들 중 딱 세 점만 팔지 않았는데 앤디 워홀의 초상화 최초의 YSL 로고 디자인 우리 어렸을 적 데이트하다가 샀던 아프리카의 새 조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피에르는 2017년 86세의 나이로 또 다른 남자 메디슨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입생로랑 재단의 부회장으로 마주레 정원에 감독하고 있는 조경사였죠.
피에르가 그 결혼 직후 죽음을 맞이한 걸 보면 아마 생로랑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곧 죽을 것을 알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유산을 남기기 위해 마지막 순간 결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창시절 성적 취향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며 우울증을 앓았던 디자이너 입생로랑 우울증에 도피체였던 패션이 그에겐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으로 YSL 브랜드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되었죠.
이상 세계적인 브랜드 입생로랑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