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3:17-22 KRV 구약 102p.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굽기 13:17-22 KRV
When Pharaoh let the people go, God did not lead them on the road through the Philistine country, though that was shorter. For God said, “If they face war, they might change their minds and return to Egypt.” So God led the people around by the desert road toward the Red Sea. The Israelites went up out of Egypt ready for battle. Moses took the bones of Joseph with him because Joseph had made the Israelites swear an oath. He had said, “God will surely come to your aid, and then you must carry my bones up with you from this place.” After leaving Sukkoth they camped at Etham on the edge of the desert. By day the Lord went ahead of them in a pillar of cloud to guide them on their way and by night in a pillar of fire to give them light, so that they could travel by day or night. Neither the pillar of cloud by day nor the pillar of fire by night left its place in front of the people.
Exodus 13:17-22 NIV
1. Short-Cut 보다는 Super-Cut 을 추구하시는 하나님.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살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긴 것은 단순히 고된 노역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뼛속깊이 노예근성으로 찌들어 있었다. 그들 공동체의 삶과 문화, 마인드, 태도가 딱 노예 군중의 수준이었다. 자유가 무엇인지 경험해보질 못해서 그들은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드려야 하는 댓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가치도 몰랐던 것이다.
완전 쫄보가 되어버린 그들이 고센에서 출발하여 블레셋 땅을 지나서 가나안으로 가는 직선코스로서 거의 40일정도면 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short-cut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거기서 블레셋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군대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공중분해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 성도로서의 삶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엄청나게 치열한 영적 전쟁이 있다. 영적 세계에서 사단의 점령지를 이탈하고자 할때 그것을 막아서는 사단의 반격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것에 영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을때 하나님께서는 정면충돌을 이끄시기 보다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돌아돌아 천천히 가게 하신다. 성경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면 그분의 기준이 결코 '빨리 빨리'가 아닌 것을 알 수있다.
성경 속 많은 인물들이 시간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완만한 타이밍 속에서 결국 굴복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대표적인 사람이 백세가 되도록 독자를 기다린 아브라함이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로와 노역의 해방을 70년이나 기다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기준은 "빨리빨리"가 아니라 "완전하게, 온전하게" 임을 알 수 있다.
시간에 갖혀사는 한낱 육신을 입은 인간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포인트가 바로 이것이다.
빨리 해결되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우리 삶에 해결되고 나아가길 바라는 많은 문제들..
학업, 진로, 결혼, 직장, 취업, 치유, 회복, 임신, 승진, 성공, 출세 등등...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성취되기 바라는 간절한 과업이지만..
자칫 빨리 해결하려고만 하다가 공중분해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아니다.
느리지만 완전한 길을, 천천히 가도 누구하나 낙오되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하나님은 인도하신다.
우리는 그 속에서 겸손을 배우고, 겸허해지며, 성숙해져간다. 그리고 그 또한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하다.
2. 요셉의 해골이 상징하는 것.
앞에는 홍해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세계최강 최신식 애굽군대가 쫒아오는 와중에
모세는 400년 전 요셉 할아버지의 유골을 챙긴다. 그 피란길에 무거운 유골을 예를 갖춰 사방에서 네명의 장정들이 들고 운반을 한다.
창세기에서 남긴 유언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다. 혹자는 이것이 언약의 성취를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건 너무 필연적인 해석이고.. 요셉의 해골이 굳이 가나안 땅까지 쫒아가야하는 이유가 있다.
요셉의 해골은 인간의 육신을 말한다.
물론 우리 모두 죽으면 해골로 된다. 해골은 그냥 해골일 뿐이지만 반드시 그 해골이 반듯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성도의 여정에서 우리의 지난 육신(해골)이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가나안)에서 부활의 몸을 입고 함께하기 때문이다.
유한하여 해골되었던 죽은자들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부활체로 일어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해골), 우리 살아남은 자 (해골을 들고가는 장정)들임을 데살로니가서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14-18 KRV
요셉의 이 해골 사건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성도들의 몸의 부활과 영원한 예루살렘 성의 입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던 역사였다.
성경의 모든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예표하고, 성도들의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부활,
그리고 예루살렘성에서의 영원한 생명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3. 낮에는 물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치열한 전투를 피하는 대신 낮에는 4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의 불기둥, 밤에는 영하 10이하로 내려가는 물기둥을 안고 살아야 하는 지리한 경험을 40년간 하게 되었다.
정말 제대로된 건물 하나도 없이 이동할 때마다 장막을 치고 걷고 하는 이 풍찬노숙 생활에서 불만 불평이 나올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고된 경험도 하나님께서 "이겨낼 수 있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다.
거센 홍해 물살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떨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발을 내딜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소망을 바라보며, 고통의 시간의 무게를 견디어내며
가히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 그보다 더한 진정한 기적이다.
인생을 살아보면 고난의 문제는 피할수가 없다. 사연없는 집이 없고 고생없는 성공도 없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통제할 수 있는 리스크는 더이상 리스크가 아닌 것처럼, 감당할 수 있는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 시간 속에서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우리를 신실한 사랑의 소유자라는 것과
또한 만물을 운행하시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가진 분이라는 신뢰다.
한밤에 사막에 떨어지는 별똥별 하나를 봐도 기가 막힌데, 40년간 하나님께서 앞서서 움직이는 불기둥이라니 그건 정말 환타스틱 어메이징이다!